살아가는이야기

대우일렉트로닉스 디자인연구소의 부활

부경(扶熲) 김기선 2008. 11. 26. 21:20

 

 

 

» 대우일렉트로닉스 디자인연구소의 최재홍 연구소장(오른쪽에서 네번째)과 직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연구소 회의실에서 디자인 시안을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주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의 여의도 디자인연구소에서 열린 드럼업 세탁기 신모델 내부 품평회. 박성철 리빙디자인팀장의 사전설명이 끝나자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디자인과 마케팅, 연구소와 영업팀 사이에 셀 수 없이 말로만 오가던 의견들이 종합돼, 기능만 빠졌을 뿐 실물과 똑같은 모형(Mock-up 모캅) 6대가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야,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것 같다.” 박선후 리빙연구소장이 불쑥 침묵을 깼다. 출시 전이라 묘사를 할 수 없어 손이 근질근질하지만, 드럼업2는 고정관념을 또한번 깬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참석자들은 성에 차지 않은 듯 의견을 쏟아냈다. 삼성·엘지 제품과 하나라도 더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지 않으면 우린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김성범 리빙국내영업기획팀장이 말했다.

10년전 그룹해체 시련속 “차별화만이 살길”
3년전 빨강·검정 면분할 ‘파격디자인’ 시작
세탁기 점유율 끌어올려…4년만에 흑자기조

10년 전 그룹 해체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시기를 견뎌온 대우일렉 사람들에게 올해 1월 내놓았던 드럼업 세탁기는 ‘작지만 소중한 신화’다. 문을 올리고 드럼 각도를 기울여 주부들의 허리 굽힘을 해결해준 드럼업은 10%에 못 미치던 대우일렉의 내수 세탁기 시장 점유율을 양판점 기준으로 30%까지 끌어올렸다. 이에 힘입어 대우일렉은 지난 1분기부터 세 분기 연속 50억~80억원씩 영업이익을 내며 올해는 4년 만에 흑자기조를 굳히게 됐다. 최근엔 미국의 리플우드와 매각협상에도 가속이 붙었다.

1990년대 중반 공기방울 세탁기로 상징되는 대우전자의 전성기를 꿈꾸는 이들 가운데엔 ‘발로 뛰는’ 디자인연구소가 있다. 한때 인력이 비슷했지만 삼성·엘지가 수백명으로 디자이너를 늘리는 동안 대우일렉은 100명 이하로 줄어든 상태. 타사에 비할 수 없는 예산에 대우일렉의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하나 할 때도 재료부터 금형 값까지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게 익숙하다.

채경아 홍보팀장은 “브랜드를 가리고 테스트할 때와 내놓고 할 때 소비자 평가가 너무 다르다”며 “물론 타사에 비해 떨어지는 브랜드도 ‘우리의 몫’이지만 가슴 아플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업계에서도 디자인공모전 같은 데서 경쟁사에 비해 대우일렉 소속 디자이너들이 불이익을 본다는 말들이 적잖다. 그래서 허동규 냉기디자인팀장은 “차별화가 살 길이라는 말에 10년의 세월이 묻어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꼭대기도 바닥도 다 맛본 잡초들”이라고 표현했다.

3년 전 시작한 아르페지오 시리즈 개발은 차별화의 신호탄이었다. 냉장고의 철판과 플라스틱 부분을 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오차 없이 면분할해 검정과 빨간색을 배치한 이 시리즈는 위험한 모험이라는 얘기가 적잖았다. 디자인도 튀었지만 불량률도 장담할 수 없었다. 최재홍 디자인연구소장은 “만날 삼성·엘지와 똑같이 만들면 따라잡기 힘들다는 공감대에 아르페지오 땐 전사적으로 한번 해보자는 의욕이 넘쳤다”고 말했다. 그 결과 ‘그 게 그것 같은’ 가전제품 시장에 2006년 강렬한 인상의 ‘물건’이 등장했다. 흑과 백으로 나눈 올해의 아수라 시리즈까지 이어졌다.




이건 시작이었다. 유명디자이너의 패턴을 사들이는 대신, 대우일렉은 제품 디자이너 절반이 매달려 수백개의 패턴을 스스로 만들었다. 드럼업 세탁기는 유리를 덧댄 고가 세탁기에만 적용되던 꽃무늬 패턴을 철판에 인쇄하기도 했다. 벗겨지기 쉬운 철판에 패턴 인쇄란 꿈같은 얘기였다. 박성철 팀장은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전국 100여 곳의 문을 두드린 끝에 광주의 한 업체를 설득했다. 얼마 전 출시한 바람업 세탁기는 일반 세탁기에 바람건조 기능과 드럼세탁기에 쓰이는 조그셔틀 등을 채용해 홈쇼핑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디자인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서정호 선임연구원은 “소비자의 욕구는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반영되지 못한 제품을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게 우리 디자인의 힘”이라고 말한다. 대우일렉의 냉장고에 자사 브랜드를 달아 파는 보쉬지멘스도, 단순 제조위탁이 아니라 디자인부터 함께 의논해가는 전략적 파트너가 됐다.

디자인연구소의 가장 큰 힘은 오랜 시간 어려움을 함께 겪은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끈끈함이다. 입사 3년차 김보영 연구원은 “구성원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 온 사원이 헌혈에 나서기도 하고, 야근으로 며칠밤 지새우고 있을 때 소장님이 직접 라면을 끓여오기도 한다”며 웃었다.

10년 전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에 반대해 겨울 찬바람 속 시위를 벌이고, 10년째 제자리걸음 보수를 받아가면서도 대우일렉의 이름을 지켜낸 이들의 힘은 무얼까. 한때 1만명에 달했던 사람들은 2500명으로 줄어든 상태. 남는 자들이 괴로워도 떠나는 자만 하겠냐만은, 지난해 1500명을 추가 감축할 당시엔 ‘후배들한테 부담을 줘 미안하다’ ‘대우의 부활을 끝까지 못 봐 아쉽다’라는 글이 사내 게시판에 줄줄이 올라왔다. 공채 1기인 최 연구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나다가 차 한잔이라도 할 수 있게 내가 일하던 곳이 없어지지 않게 해달라’던 부탁들에 대한 책임감이 지금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는 것 같다.”

김영희 기자 dora@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