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이야기

[스크랩] 한 우물만 파지 말라… 학문도 퓨전시대

부경(扶熲) 김기선 2008. 3. 27. 19:19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21세기 경쟁력은 통섭에서 나온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2005년 4월이니 아직 3년이 채 못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기간 동안 '통섭(統攝)'은 어느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개념어가 되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제안한 '문화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통섭은 상당히 성공적인 밈(meme?전승을 되풀이하는 문화 구성요소)이다.

나는 통섭이 이처럼 성공적인 밈이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사회적 배경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업들은 컨버전스와 M&A를 겪고 있었고, 문화는 온갖 종류의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고, 미식가들은 퓨전 레스토랑을 찾고 있었다. 피가 섞이고 문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우리 시대를 혼화(混和)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혼화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회현상들은 거의 대부분 복잡계 수준의 문제들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홀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일찌감치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한 곳이 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산타페연구소(SFI: Santa Fe Institute)이다. 그곳에는 물리학자, 생물학자, 인문사회학자들이 한데 모여 생명의 기원과 합성을 탐구하고 '생물학적 뉴턴의 법칙'을 모색하며 인간사회의 갈등과 협동에 관한 모델링을 통해 문명의 역동성을 분석하고 시장의 혁신을 도모한다. 1984년 많은 학자들의 우려 속에 문을 연 산타페연구소는 이제 21세기 학문활동의 전형으로 우뚝 섰다.

1933년 하버드대학에 세워진 명예교우회(Society of Fellows)는 지식의 통합은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 간의 격식 없는 토론, 즉 잡담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긴 기관이다. 철학자 콰인이 노벨상 수상 신경생물학자 데이비드 휴벌과 마주앉아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게 된 곳이다. 스키너, 촘스키, 윌슨 등이 그곳을 거쳐간 '젊은 학자(junior fellow)'들이다. 1970년에는 미시간대학에도 명예교우회가 만들어졌고 나는 그곳에서 1990년대 초반 주니어펠로우로 꿈같은 3년을 보냈다. 그 3년이 내 학문의 주춧돌을 놓아주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연과학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문사회학의 경계에 기대어 있는 듯한 생물학은 가장 화려한 변신을 거듭한 학문 분야이다. 20세기를 거치며 분과 학문시대의 표상처럼 수없이 많은 학과들로 쪼개져 있던 생물학은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통합생물학과'로 거듭난다. 부분만 들여다보아서는 결코 복합적인 생명현상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된 통합의 바람은 이제 하버드대학에서 시스템생물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물리학, 화학, 컴퓨터과학, 공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학문의 벽을 허물고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진화된 시스템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지구촌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과학기술 메타문명으로 묶여 있다. 그 속에서 온갖 형상의 '문화바이러스'들이 자신들의 전염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전염성이 강한 문화바이러스는 당연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이 풍요롭게 일어날 수 있는 토양에서 자란다. 21세기 경쟁력은 외곬 전문성이 아니라 전문인들 간의 유기적인 통섭에서 나온다. 통섭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다.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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