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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우정(펌)

부경(扶熲) 김기선 2007. 6. 18. 11:40
아침을 열며]  내가 꿈꾸는 우정

지금 생각해보면 탄광촌 깡촌 태생인 내게도 잊지 못할 어렸을 적의 추억들이 많이 있다. 우리집 구멍가게에서 껌 한 통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나올 때의 조마조마하던 추억, 이웃집 배나무에 올라갔다가 잡힌 일 등, 여러 추억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특히 영화를 보려고 몰래 극장 유리창을 넘고,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던 추억이 새롭다. 지금도 그 때의 생각을 하며 가끔은 먹거리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천천히 줄을 서서 들어가 영화를 보는 걸 즐긴다. 또한 오래된 영화중에서 소장품을 꺼내서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에 홈시어터로 즐기는 여유 또한 버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CD로 보관하고 있는 소장영화중에서 으뜸은 '시네마천국(Cinema Paradiso)'을 들 수 있다.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 영화 속에서 꿈을 키워온 장난꾸러기 어린 토토와 그의 꿈을 가꿔온 영사기사 알프레도의 우정은 햇살을 받으며 달려가는 자전거의 선율이 포근하게 담겨 있는 영화이다. 또 하나 아끼는 소장품은 몸만 커버린 소년과 조숙한 소녀의 사랑을 매력이 철철 넘치게 그려낸 영화 '레옹(Leon)'이다. 주인공 레옹은 총기와 화초를 제외한다면 토니와의 잠깐만의 대화가 전부이다. 레옹은 바람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살인대상을 처치하고 그의 아파트로 가서 운동을 하고 화초에 물을 주는 것으로 소일한다. 그러던 중 가족이 모두 살해되는 현장에서 12세 소녀 마틸다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틸다는 아버지뻘 되는 레옹에게 차츰 의지하게 되고 연민의 정을 서로 나누게 된다. 레옹과 마틸다는 스텐스형사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가지만, 결국 그들의 은신처는 끝내 경찰에 의해 포위된다.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레옹은 마틸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스탠스와 폭사한다. 혼자 남은 마틸다는 레옹의 화초를 들고 나와 가만히 화초를 땅에 심는다.

이 두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들이 큰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에 이끌려서이다. 시네마 천국에서 성장한 토토와 사촌누이와의 사랑이나, 레옹에서의 섬뜩할 정도의 킬러 본능을 기억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정을 나눈다하면 어렸을 적부터의 초중고 학교 친구, 대학교에서의 몇몇 친구, 군대나 사회에서의 술친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동년배이거나 나이차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토토와 알프레도, 레옹과 마틸다의 우정은 세대간을 뛰어 넘고 뭔가를 기대하지 않는 무소유의 희생적 우정을 그리고 있다. 불이 난 영화관에서의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나누어 주는 깊은 사랑, 레옹의 죽음을 불사하는 자기희생적 우정이 부럽다.

또 하나 마음을 끄는 우정이 있다.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이름이 비슷해서 항상 헷갈리기만 했던 두 화가, 인상주의 두 대가인 마네와 모네의 우정이 그렇다.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되는 이런 혼란은 꼭 이름에서만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했고 서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832년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모네보다 8살이 많았던 마네와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헤쳐 나가는 불리한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한 모네의 우정은 남달랐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된 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 바티뇰의 한 카페에서였다. 서먹한 사이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두 사람은 곧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임을 알아차리고, 마네의 재능과 실험정신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모네는 그런 마네를 선배로서 의지하였다. 정상에 먼저 올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들에게 있을 터인데, 친구를 부축해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두 사람의 우정은 회화와는 별개로 본받을 만하다.

내게도 이런 비슷한 우정이 있었던가. 약간의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로서는 알프레도나 레옹같은 우정을 싹틔우기가 쉽지 않다. 설령 시간이 나도 직장동료들이나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언제나 느낌표이지만 사랑은 언제나 물음표라고 했던가. 사람이 차지게 살아가는 데는 우정은 무엇보다 값지고 영원한 것이다. 자신에게 영원한 우정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은 이미 패배한 것이다. 우정은 하찮게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아주 귀하고 비싼 금은과 같은 존재이다.

퇴근 길, 동네 어귀 조용한 카페에서 나누는 여주인과의 우정, 만날 때마다 방긋방긋 미소를 전해주는 꽃집 아가씨와의 우정, 신입직원과 주고받는 멘토로서의 우정, 오래전 살아가는 법을 내게 가르쳐준 선배와의 우정, 여느 모임에서 가끔 만나지만 웬지 끌리는 사장님과의 우정, 이런 우정이 처절하게(?) 그립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중소기업지원본부장 이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