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쇼(‘서인영의 카이스트’) 출연을 망설이던 가수 서인영이 “(대학 면접에) 합격하면 구두 사줄게”라는 PD 말에 눈을 빛내며 “신상?”이라고 응수하던 순간, 모든 것은 예고되었다. 구두에 진흙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레 길을 걷고, “사이즈가 품절됐다”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며, “내 새끼들, 잘 지냈어?”라며 신발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 가상 남편 크라운 제이에게 신상 옷을 사 달라고 앙탈을 부리고, 신발장을 채우고 넘치는 수백 켤레 구두 사이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녀. 2008년 트렌드계의 신상(신상품의 준말) ‘신상녀’의 등장이다.
된장녀에서 신상녀로, ‘스타일’의 부상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가 세계 관객을 찾았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시즌 동안 방영됐던 동명의 미국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들에게 패션 바이블이자 연애 지침서로 군림했다. 동창회라도 연 양 요란스럽게 돌아온 네 주인공(캐리·샬럿·미란다·사만다)은, 한결 늙은 모습이긴 하지만, 사랑과 우정과 여자의 성공을 ‘캣워크’ 위에 펼쳐놓았다.
무엇보다 ‘신상녀’의 대모라 할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 분)를 보라. ‘웨딩드레스’라는 완소(완전 소중) 아이템을 비롯해무려 1000여 벌의 ‘신상’으로 눈과 지갑을 현혹시킨다. 신혼집 안에 집채만 한 옷장을 맞춰 넣는 캐리야말로 대한민국 ‘신상녀’의 로망 아니겠는가.
‘신상녀’는 한국에선 개똥녀·딸기녀·된장녀 등 인터넷을 달구었던 숱한 ○○녀를 뒤잇는 신조어다. 특히 ‘된장녀’와는 자매 격이라 할 만하다. 2006년 검색 포털 야후코리아가 그해 최고의 유행어로 꼽기도 했던 ‘된장녀’는 당시 “고급 커피를 마시고 명품 백을 들고 다니면서 돈 많은 남자를 찾는 여성”으로 묘사됐다.
이때 고급 커피의 대명사로 지목됐던 ‘스타벅스’는 국내에 이른바 ‘뉴요커 스타일’을 들여온 첨병이다. ‘된장녀’ 논란이 무색하게도 해마다 쑥쑥 성장해 1999년 7월 서울 신촌 1호점을 시작으로 9년 만인 2008년 6월 현재 국내 점포가 250곳을 넘어섰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고 ‘된장녀’라면, 요즘 점심 직후 직장인·대학생은 된장 독에서 헤엄치는 셈이다.
새로 등장한 ‘신상녀’는 ‘소비 지향’의 측면에선 ‘된장녀’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신상이라니! 매 시즌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에 눈독을 들이자면, 카드 한도가 무한대라도 거덜날 판이다. 그러나 ‘신상녀’ 서인영도 그 모든 신상 구두를 사들이진 못한다. 캐리가 1000여 벌의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들 그것은 영화 속 캐릭터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보는 눈은 ‘된장녀’와 달리 한결 관대하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스타일’ 때문이다.
트렌드 세터로 각광 받는 ‘스타일홀릭’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제목이기도 한 ‘스타일’은 백영옥이라는 작가를 일약 ‘정이현 급(그런 게 있다면)’에 올려놓으며 발매 두 달 만에 20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할리퀸 로맨스에 패션을 입힌 것일 뿐”이라는 일부 비판이 무색하게도 31세 패션지 여기자를 내세운 ‘칙릿(chick-lit)’은 대담하다.
“이번 시즌 구찌의 하이힐 굽만큼 뾰족한 저 입술” 같은 비유를 서슴지 않으며 “15㎝ 이상의 높은 하이힐을 가리키는 ‘킬힐’을 타란티노 감독이 만든 영화 ‘킬빌’의 아류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애처로움을 감추지 않는다. “세상에 수많은 컬러가 존재하듯 다른 형태의 스커트와 팬츠가 존재”함을 아는 사람, 그렇기에 “디테일과 꿈을 파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주인공이다.
디테일과 꿈. 그것이 신상녀를 새롭게 정의한다. ‘신상녀’가 되려면 적어도 매 시즌 무엇이 핫(hot)한 지, 브랜드의 미세한 달라짐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함을 갖춰야 한다. 전자제품을 먼저 써보고 입소문에 앞장서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의 여성판 버전인 셈이다. ‘얼리 어답터’에게 일류 브랜드가 단지 참고 사항일 뿐이듯, 신상녀에게 명품 브랜드는 다양한 선택 사항 중 하나다.
수많은 디테일 중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골라냄으로써 이들은 무분별한 ‘된장녀’의 오명에서 벗어난다.
스타일과 신상녀의 만남은 대중문화의 ‘신상’이다. 여성 시청자들을 겨냥한 온스타일과 올리브 등의 케이블TV 채널은 ‘스타일 매거진’ ‘스타 스타일’ ‘잇 스타일’ ‘스타일홀릭’ 등의 프로그램으로 출연진 수에 맞먹는 저마다의 스타일을 소개한다.
MBC 주말드라마 ‘달콤한 인생’의 홍다연(박시연 분)처럼 남과 같은 것을 못 참고 저만의 아이템을 갈구하는 등장인물이 뜬다. 어디 트렌디 드라마뿐이랴. KBS 주말극 ‘엄마는 뿔났다’에서 절친한 친구의 유품이라며 영수(신은경 분)에게 건네진 것은 친구가 생전 아끼던 가방이다. 두 번밖에 안 들었다고 강조하면서까지!
여성 소비자의 구매력에서 활로를 찾는 최근의 미디어는 ‘신상녀’에 긍정적 의미를 덧칠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때깔 나는 화면에 유혹적인 화면을 담아야 하는 HDTV는 지난날 ‘과소비’로 비난받던 것들을 ‘대리만족’의 세계로 돌려놓는다. 심지어 시청자에게도 ‘그림의 떡’만은 아니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방영했던 미 HBO TV는 수년 전 명품 드레스와 인기 아이템을 경매하는 웹사이트를 마련했다. 국내 인터넷에선 트렌디 드라마와 리얼리티 쇼가 방영된 직후 “○○ 스타일 어디서 구하나요?”의 질문과 대답이 실시간으로 오간다. 신상녀에 ‘트렌드 세터’라는 훈장을 수여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쇼핑의 쾌락영국의 인기 칙릿 ‘쇼퍼홀릭(황금부엉이)’은 매권 “겁먹지 마(Don’t panic)”로 시작한다. 주인공 레베카를 공황 상태로 몰고 가는 주범은 그달의 카드 청구서. 참을 수 없는 쇼핑의 유혹에 번번이 패배한 레베카는 신용불량자 신세에 몰렸다가 자신의 모든 쇼핑 물건을 빚잔치하듯 경매에 내놓음으로써 가까스로 탈출한다.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게 아니라, 프라다를 욕망하는 여자는 악마나 진배없다.
하지만 오늘날 취미란에 ‘쇼핑’이라고 당당히 쓰는 여자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현대미술가 바버라 크루거가 풍자한 대로 현대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쇼핑하는 존재다(‘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I shop, therefore I am’). 쇼핑을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메시지가 24시간 포위하는 사회에서 ‘차라리 내가 상품을 선택하고 값을 치르고 구매하는 행위에서 자율성을 행하는 게 능동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돋아난다. “쇼핑이란 현대사회의 ‘조각난 개인’이 ‘조각난 현실’을 이용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이론적 뒷받침까지 더해지니 말이다(『쇼핑의 철학』, 개마고원).
구시대의 믿음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 가꾼다’는 것이었지만,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지난 세기에 이미 말했다. “그녀(우아한 여성)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치장한 자신이지, 그녀를 치장한 물건 자체는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성취에 보상하려는 마음이 ‘쇼핑’으로 구현될 뿐이란 것이다.
문화평론가 정여울씨는 “남자의 재산에는 관심 없고 오직 사랑에만 목숨 거는 캔디렐라(캔디+신데렐라)의 시대가 가고 신상(품)과 명품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속물성이 오히려 ‘솔직함’이라는 미덕으로 추앙받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이때 속물성을 당당한 솔직함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나의 능력에 대한 대가’라는 윤리일 테다.
그래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사만다는, 갖고 싶었던 반지를 경매를 통해 선물해준 남자친구를 짜증스러워하며 말한다. “이 반지가 내 성취의 보상이었으면 했다고! 지금은, 반지에서 내가 아니라 그가 보여!”
“좋아하는 것 즐길 뿐 된장녀 시선 걱정 안 해”
리얼리티 쇼에서 ‘신상녀’로 뜬 가수 서인영
강혜란 기자, 사진 신인섭 기자 | 제66호 | 20080614 입력
시즌 잇백(It Bag)이 가장 먼저 품절되듯, 요즘 가장 핫한 ‘잇걸(It Girl)’ 서인영(24)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청담동 미용실에서 1시간30여 분을 기다린 끝에 허락된 시간은 불과 20분. 밀려드는 스케줄 때문에 잠잘 시간도 부족한 그녀를 겨우 붙잡았다(이래서 ‘신상’은 서둘러 찾아야 한다!).
“저의 세계가 원래 독특해요. 연예인 되기 전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요. 하던 대로 할 뿐인데, 이런 걸로 사랑받기도 하는구나 싶고….”
‘거침없다’는 표현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TV에서 보던 그대로 ‘까칠 반 털털 반’이다. 알려진 대로 ‘신상녀’ 서인영이 확 뜬 것은 두 리얼리티 쇼 덕분.
연예인 커플의 가상 결혼 생활을 담은 ‘우리 결혼했어요’(MBC, 이하 ‘우결’)와 좌충우돌 명문대 체험기인 ‘서인영의 카이스트’(Mnet, 이하 ‘카이스트’)가 그것이다. 고등학생 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2002년부터 4인조 여성그룹 ‘주얼리’의 멤버로 활동해 왔지만 이제껏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 것은 손꼽을 정도.
“가수니까 무대에서 멋있으면 장땡(최고)이라고 생각했죠. 설정된 대본에다 개인기 같은 것도 저랑 안 맞고…. 저는 연예인이 아니라 저대로 살고 싶거든요.”
“저(자신)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꺾지 않았음에도 예능 프로에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최근 방송계에 ‘리얼리티 쇼’가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다. 평소 서인영의 독특함과 가식 없음을 눈여겨봤던 PD들이 그녀의 캐릭터가 살아날 수 있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잇따라 기획했다.
‘신상 구두 타령’이 여과 없이 비춰지면서 초반엔 안티 팬의 질타도 잇따랐으나 서서히 보는 눈이 바뀌었다. 서인영의 ‘리얼리티’ 안에 ‘신상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 싶은 구두를 갖기 위해 몸이 부서지도록 프로 근성을 발휘하는 열정적인 ‘신여성’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된장녀, 뭐 그런 거에 대한 부담은 없었어요. 내숭 떠는 걸 싫어하고, 원래 제가 그런 것 좋아하니까 다 솔직히 보여주고 싶었어요. ‘카이스트’ 같은 경우엔 천재들 앞에서 내가 바보처럼 보일까봐 그게 오히려 걱정됐죠. 하지만 진심은 통하더라고요.”
그 진심은 ‘카이스트’ 마지막 회에서 뭉클한 감동까지 선사했다. 기말고사를 통과한 대가로 받게 돼 있던 ‘신상 구두’를 포기하고, 친하게 지냈던 학교 친구들에게 ‘신상 운동화’를 선물했던 것이다.
‘우결’에서도 그녀는 어른에게 예의 바르고, 필살기인 애교로 남녀관계를 능숙하게 끌고 가는 ‘협상가’적 면모를 과시한다.‘신상녀’로 뜬 덕분에 편해진 게 있다. 가수로선 드물게 협찬이 밀려들어오는 것. 매니저 류재현씨는 “인영씨가 ‘우결’에서 신고 나온 뒤, 확 뜬 제품이 몇 개 있는데, 그 덕분에 요즘엔 우리 구두 좀 신어달라는 요청이 꽤 들어온다”고 전했다.
이제 매번 ‘우결’ 촬영 때 준비하는 40여 켤레의 구두 중 절반은 매장 협찬을 받고 있다. 헤어스타일부터 립스틱·배바지·보타이 등 서인영이 입고 걸치는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나만의 스타일’이 추구하던 특성상 이런 추종 세력이 싫진 않을까?
“처음엔 브랜드 알려 달라고 하면 ‘왜 따라 하지?’ 이러면서 싫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젠 패션이고 화장이고 같이 가려고 해요. ‘서인영 크루(crew)’를 만드는 거야. 청순가련? 오 노~. 서인영 스타일로 가는 거야.”
눈부셔라, 지름신의 향연
협찬 마케팅 치열한 미국 드라마
문은실(미드 칼럼니스트·전문번역가) | 제66호 | 20080614 입력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진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화화를 두고 뉴라인 시네마 홍보 담당자는 “이 영화는 여자들을 위한 수퍼보울”이 될 것이라고 환호성을 올렸다. 이미 드라마를 통해서 무명과 다름없었던 지미 추와 마놀로 블라닉이라는 브랜드를 세계 최고의 명품 대열에 입성시켰던 전례가 있었던지라, 보다 공격적이고 글로벌한 마케팅이 가능한 영화판 ‘섹스 앤 더 시티’는 전 세계에서 가장 광고료가 비싸게 책정된다는 수퍼보울에 버금가는 광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다.
그에 걸맞게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에는 벤츠·스와로브스키·스카이 보드카 등 일곱 개의 공식 스폰서를 무색하게 하는 크고 작은 PPL 광고(간접광고)의 향연이 펼쳐진다. 루이뷔통, 크리스찬 디올, 샤넬, 페라가모, 헤르메스, 프라다, 베르사체, 구찌 등의 명품은 물론이고, 나이키·아디다스·헬로 키티와 같은 대중 브랜드에다 애플 컴퓨터, 뱅 앤 올룹슨, 블랙베리 등의 전자제품까지 망라돼 있다. 한마디로 장면 하나하나가 위시 리스트(wish list)인 셈이다.
증거 사진 찍는 카메라도 ‘신상’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이른바 ‘신상녀’들의 당당한 외침을 현실화시켜 주는 간접 통로 역할을 했듯, 미드(미국 드라마)의 바다에는 무수한 소비의 유혹이 존재한다. 뉴욕의 최상류층 고교생들을 등장시킨 드라마 ‘가십걸’ 속 패션은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동시에 여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사진 신인섭 기자, 촬영협조 프렌치솔 앤 런던솔 | |
인터넷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캡처와 서핑을 통해서 필립 림, 발렌티노, 마크 제이콥스 등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옷의 정체를 밝혀내고, 언젠가는 꼭 구매할 수 있으리라 불타오르는 가슴을 다독인다.
지름신의 유혹은 옷·구두·가방 같은 여자들의 전통적인 아이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컴맹이면 뭐 어떠랴. 노트북은 은빛 갈치색 맥북 프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날로 늘어간다. 드라마 ‘엘 워드’ ‘베로니카 마스’ ‘어글리 베티’를 보니까 능력 있는 여자들은 모두 그걸 쓰더라는 게 이유다.
젊은 부부들은 시트콤 ‘프렌즈’를 보면서 인테리어 리노베이션의 꿈을 키운다고 한다. 피비가 “카탈로그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며 질타했던 로스의 아파트는 미국의 가구 브랜드 ‘파터리반’의 간접광고이며, 챈들러와 조이가 천생 사내들임을 과시하듯 쫙 퍼져 앉아 있던 일인용 가죽 의자 ‘레이지 보이’는 국내에 리클라이너라는 미국 카우치 포테이토 문화를 소개한 일등 공신이다.
조금 더 예산을 잡고, 카탈로그 같은 방 안 풍경을 피해보고 싶다면 ‘The O. C.’의 이선 앨런(Ethan Allen)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닙턱’의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 아들 방에 이케아 서랍이 놓여 있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남자들이라고 안전할 수는 없다. 마이애미 해변을 가로지르는 ‘CSI 마이애미’의 허머 SUV는 사내들의 굳은 로망이다. ‘앙투라지’의 주인공은 자신이 꿈꾸는 대스타에 한참 못 미쳐 있는 주제에, 드는 기름 값을 따지면 길에 동전을 줄줄이 깔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허머를 고집하고 간간이 스포츠 세단 마세라티로 포인트를 준다.
‘위기의 주부들’에서는 주인공들의 패션 경합이 눈요깃거리이지만, 가브리엘이 타고 다니는 에스틴 마틴 컨버터블 앞에서는 남녀 공히 입맛이 다셔지는 것을 피할 길이 없을 터이다. 또 ‘길모어 걸스’에서 로리는 예일대학교 입학 선물로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를 받는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대스타들이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 프리우스에 열광하고 있으니, 영화 한 편에 개런티 수천만 달러를 받는 스타들이 걸어 다니는 PPL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증거 사진을 찍는 대원들의 최신형 니콘 카메라는 기종 변경의 유혹과 장비에 대한 갈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드라마 ‘닙턱’의 수술 장면이 시작할 때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뱅 앤 올룹슨의 최고급 오디오는 어떤가. 1000만원이 훌쩍 넘는 이 물건은 세균 감염을 조심하느라 아무 데나 손을 가져다 댈 수 없는 수술의들이 앞에다 슬쩍 손을 흔들기만 해도 센서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 건너뛰는 시청자 간접 공략미드에서 간접광고를 통한 마케팅이 활발해지는 이유는 인터넷의 발달과 티보(Tivo)와 같은 디지털 비디오 리코더가 등장한 이유가 크다. 시청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아이팟으로 드라마를 내려받아 보거나, 티보로 녹화된 드라마를 볼 때 오프닝 크레디트를 건너뛰고 보는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런 시청자들의 경우 많게는 3분의 2가량이 녹화된 광고를 건너뛴다고 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소스의 불법 유통만 성토하며 손 놓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광고에 돈을 쏟아 붓기보다는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협찬이나 공식적인 PPL을 통해 마케팅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영화화된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예에서 알 수 있듯, 효과적으로 포지셔닝된 드라마 한 편은 그 어떤 광고보다도 큰 매출 증대 효과를 올릴 수 있다. 미드를 보는 시청자들은 블랙베리폰의 한국 상륙 이전에 이미 그 휴대전화의 쓰임새와 위력을 잘 알고 있었고, 애플의 반짝이는 사과 마크는 이제 PPL을 통할 필요조차 없어진 일상화된 아이콘이 됐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어지러이 난무하는 PPL의 향연에, 지름신의 강림에 가슴앓이만 한다면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전도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자. 상품들의 전시장만이 되기에는 아직까지 미드는 너무나 재미있는 드라마들을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신이 ‘된장녀’가 아니란 걸 보여줘!
남자들이 ‘섹스 앤 더 시티’를 두려워하는 까닭
송원섭 | 제66호 | 20080614 입력
많은 여자들은 ‘섹스 앤 더 시티’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담은 종합 선물 세트라며 환호성을 올린다. 그 이유를 알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잘 만든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최대 강점은 탄탄한 캐릭터의 구축과 생동감 넘치는 대사에 있다. 여자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대본 덕분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도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빅이 자기보다 젊고 미인인 데다 돈도 능력도 넘쳐나는 여자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애에 젖는 캐리의 모습이나, 아파트에 입주하려다 전 주인이 외롭게 살던 늙은 독신 여성이었고 시체가 발견됐을 때는 기르던 고양이가 굶주려 시신의 얼굴을 파먹은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패닉 상태가 되는 미란다의 이야기는 ‘그래, 나 같아도 그럴 거야’라는 공감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이런 드라마를 두고 왜 남자들은 비현실적이라는 둥, 주인공들이 너무 늙고 못생겼다는 둥, 뉴욕에 가 봐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다는 둥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 또한 간단하다. 그건 바로 여자들이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태도가 남자들이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에 열광할 때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모여서 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대화 내용의 절반 이상은 그녀들의 스타일과 소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많은 여자들이 “우리는 옷 구경을 하려고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는 게 아니다”라고 항변하지만 전체를 놓고 볼 때 이건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굳이 이 드라마를 통해 세계적인 인기 브랜드가 된 몇몇 상표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옆에서 은근히 불안해진다. 정말 저 여자들에겐 저게 전부인 게 아닐까. 저 여자들의 인생이란 ‘좋은 남자를 만나는 일’과 ‘어떻게 하면 명품 옷이나 가방을 마련할 수 있을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심지어 그 여자들이 자신의 아내나 연인이라면, 그녀들의 머릿속에서 나의 가치는 신용카드의 한도 사용액으로 채점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드라마가 좋게 보일 리 만무하다.
해서, 현명한 여자들에게 권하는 말이 있다. 남자들이 은근히 ‘섹스 앤 더 시티’에 대해 ‘나이 들고 못생긴 여자들이 잘생기거나 돈 많은 남자들과 놀아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할지라도 그건 그들이 공포를 표출하는 방법이라는 걸 이해하기 바란다.
단순한 그들의 걱정에 맞서 이 드라마가 얼마나 잘 만든 드라마인지 항변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일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당신이 돈과 명품 쇼핑에만 목을 맨 여자가 아님을 보여주면 된다. 그거면 당신은 남자들의 목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안도의 한숨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정말로 그것 외에 당신의 인생엔 아무것도 없다면, 그로 인해 빚어지는 일은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물론 당신이, 그따위 ‘찌질한 남자들 따위’엔 아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든 상관없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