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부경(扶熲) 김기선 2006. 3. 17. 08:32

좋은 이야기-060316 [詩한수 음미하며...'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 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


        저 벽에 걸린 바지는 국방색이다
        단단한 청춘의 허벅지가 쑥 빠져나갔다
        나는 후줄그레한 저 바지를 볼 때마다
        우리들의 뒷골목을 돌아가야 빠꼼하게 간판불을 달고 있는
        여인숙을 생각한다
        그리운 냄새가 킁킁, 날 것도 같다
        휴전선 이남에서 국방색 바지 입고 좆뺑이친 사내들 중에
        50년대 이후 거기 누워 옆방에서
        힘쓰는 소리, 욕지거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국방색 바지가 걸려 있는 모든 방은
        그래서 붉은 유곽이며
        우리는 유곽이 키운 자식들이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 훌러덩 벗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나라에서
        그 바지 속에다 팽팽한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헌 자전거 타고 연대본부에 출근하던 나는
        방위병이었다, 그때
        군용트럭 위에서 여자만 보면 주먹감자를 먹이던
        현역들의 성욕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국방색 바지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짬밥을 퍼먹을 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어이 물방위, 하고 불러서는 차렷, 열중쉬어 시키던
        한참이나 어린 상병의 낯짝에 침 한번 뱉지 못했던 것도
        계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국방색 바지를 그보다 먼저 벗게 되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군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 하셨지만
        나는 내 아들에게는 다시는 입히지 않을
        녹슨 못대가리에 달랑 매달려 있는
        치욕의 빈 껍데기 같은

        국방색 바지 .

                                                                              - 안도현 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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