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집(스크렙)

詩한수 음미하며...'즐거운 인생'

부경(扶熲) 김기선 2007. 8. 28. 17:51
<즐거운 인생1-창세기>

이원


첫째 날 신은 빛과 어둠을 복제했다
빛과 어둠 속에는 신의 소유가 아닌 것들이 수두룩했다
순식간에 천지간이 있었다 달이 있고 해가 있었다
그 순간부터 불법복제물이 성행했다
의외의 사태는 신이 보시기에 좋았다

둘째 날 신은 풍문을 복제했다
어디할 것 없이 천지간은 풍문에 휩싸였다
유력한 진원지가 안개구름 하수구 
그림자 거울로  쉴 새 없이 바뀌었다
심심하지 않아 신은 보시기 좋고 놀기 좋았다

셋째 날 신은 짐승을 복제했다
전지전능했으므로  기분나는 대로  복제해  천지간에 던졌다
머리몸통 다리가 한  개에서부터 
서른  두 개까지 제 각각이었으나 피비린내 나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우두커니  흙을 파먹는것
서로 몸 속을 파고드는 것 제 살을 
쪼아먹는 것까지  제각각이었으나 닮은 것들은 보자마자
서로 핥거나 울부짖었다

넷째 날 무허가 신들도 짐승을 복제했다
한밤이 되자 먹다 남은 흙과  휘발유와 신나와 
소다와  방부제와 어둠과 우리밀가루를 
섞어  반죽했다 무엇이든 듬뿍듬뿍 넣었다
신의 가까이에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다는
풍문이  무성했으므로
짐승들은 하늘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발 아래가 풍성해졌으므로 신이 보시기에 좋았다

다섯째 날 신은 눈물을 복제했다
지난밤의 과음으로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내 신은 제 눈물을 받아먹었다

여섯째 날 신은 인간을 복제했다
한참이 지나자 나침반이  동이 났다
인간  만들기에 흥이 난 신은
많은 수를 나침반을 넣지 않고 그대로 마무리했다
이들의 작동 버튼은 고의라기보다는 신의 실수로 
눌러졌다는  풍문이 우세했다
몸에 나침반이 들어 있지 않은
인간들은 자주 길을 잃게 되었다

일곱 째 날 인간은 새우깡을 만들었다
이것에서는 찝질한  냄새가  났다 
오래 전에 죽은 영혼에 배여 있던 몸 냄새라고도 했다
누구나 이것을 먹으면 허기가 없어졌다


2003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이원 시인 약력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1992년 『세계의문학』가을호에「시간과 비닐 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문학과지성사,1996)와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등 2권의 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