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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南怡)장군의 북정가(北征歌)

부경(扶熲) 김기선 2006. 4. 19. 08:55

남이(南怡)장군의 북정가(北征歌)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波飮馬無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파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남아이십미평국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로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 없애네.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어느덧 올해의 반의 반이 훌쩍 지나고 나니
문득 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가 생각납니다.

세월의 덧없음에 넋놓고 지내고 있으니 한탄스럽기만 합니다.

남이(세종 23 - 예종 1, 1441-1468)는 세종 23 년(1441)에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서,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 13년 (1467)에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 (右大將)으로 이를 토벌,적개공신(敵愾功臣) 1등 에 올랐습니다.
또한,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예종원년(1468) 역모로 몰려 죽었습니다.

북정가는 남이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평정비를 세우고 비문에 새긴 시로 그 천재성과 기개를 볼 수 있다.

인재박명이라고 했던가.
재능있는 자는 적도 많기 마련,
세조는 태종의 외손자로 왕실에서 나온 인재이자 세조의 공신 권람의 사위인 남이를 총애하였습니다.
세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던 젊은 실력자 남이를 시기하던 원로 공신들 중 한계희(韓繼禧)가 남이의 북정가가 모반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세조는 남이를 병판에서 물려나게 하였습니다.
마침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그해에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남이는 혜성을 바라보며
"옛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이 날 기상이로구나"
하고 한마디 하였는데, 이를 듣고 있던 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역모한다고 무고하였습니다.

20세의 젊은 왕 예종은 선왕때 부터 성격이 급한 젊은 실력자 남이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고문하여도 자백이 나오지 않자, 남이가 역모를 품고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이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리요?)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부르겠는가?

라는 시를 남겼다고 북정가가 그 증거로 제시되었습니다.
몇번인가나 비문을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한결같이 득(得)자가 틀림없다고 하였답니다.

고문 끝에 남이의 발이 부러지고 고통을 못이긴 남이가 이시애 난 평정 때의 대장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강순(康純)을 공범으로 지목했습니다.
강순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남문 외형장 (南門外刑場) 으로 가는 수레에서 강순이 남이에게 "왜 나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고 묻자,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 80으로 살만큼 산 사람이, 함께 평정을 간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한마디 변호도 하지 않은 불의는 죽어 마땅하다 하였답니다.

예종원년(1468) 역모로 몰려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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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이 시대에 남이장군과 같은 기개있는 분들은 다 어디에 계십니까?
듣느니 부정이고, 갈취고, 무슨 경악이라고 하고, 브로커와 같이 술마시고,
이 시대 대장부는 없고 쫌팽이 들만 남았단 말입니까?
무리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기개를 활짝 열고 끄집어 내어야 겠습니다.
그리고 통큰 걸음걸음을 내 딛어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더끈이의 오늘의 생각이었습니다.